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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이슈 리포트 1호 | 당사자를 경험전문가로 세우는 돌봄정책 전환 방향

발행일: 2026.05 저자: 서정주 (사이임팩트 대표) 발행처: 한국리빙랩네트워크, 돌봄리빙랩네트워크, 사이임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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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이 리포트는 한국의 돌봄정책이 당사자를 ‘관리 대상’으로 보아온 한계를 분석하고, 당사자를 ‘경험전문가(Lived Experience Expert)’로 세우는 정책 전환을 제안한다. 경험전문가란 질병·돌봄을 직접 겪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정책·연구·서비스 설계 과정에 현장 전문가로 참여하는 당사자다. 이들은 통계나 전문가 분석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지식을 갖고 있다.
분석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나라 중 하나다. 치매 환자는 2025년 97만 명에서 2050년 226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며, 국가 치매관리비용은 이미 약 22조 원(GDP의 약 1%)에 달한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집에서 살기를 원하고 복합적인 지원이 필요한데도, 제도는 여전히 시설 중심이고 서비스는 파편화되어 있다. 수요와 제도 사이의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초래한 치매·돌봄체계의 구조적 문제점 다음과 같다.
당사자를 수동적 수혜자로 가정하는 정책·서비스 패러다임
돌봄 서비스의 기관·사업별 파편화와 가족을 전제로 한 설계로 인한 서비스의 접근성·연속성 부족
여성에게 돌봄이 집중되는 구조와 이에 따른 돌봄노동의 가치절하
국제 동향
일본은 ‘인지증기본법’을 통해 치매정책의 원칙을 ‘환자를 위해(For)’에서 ‘당사자와 함께(With)’로 바꾸고, 치매 당사자 워킹그룹을 법과 계획 수립 과정에 포함시켰다. 영국·유럽의 치매 워킹그룹, 미국의 뇌 건강 중심 통합돌봄 모델 등은 경험전문가를 정책 설계와 서비스 개선의 핵심 주체로 세우고 있다. 이는 당사자 참여가 인도주의적 배려가 아니라, 정책의 효과와 정당성을 높이는 전략적 선택임을 보여준다.
정책 제언
국내에서는 치매 경험전문가와 창작자의 공동작업인 ‘냉장고 안 리모컨’, 뇌전증 엄마들의 자조모임에서 출발해 조사·보고서·정책 제안으로 이어진 ‘에필랩’ 등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제도화하기 위해 본 리포트는 다음 다섯 가지 과제를 제안한다.
제언
사례
① 치매·돌봄 관련 정책위원회 내에 경험전문가로서의 당사자 참여 의무화
일본 인지증기본법
② 경험전문가의 창조 활동과 정책 역량 강화를 위한 중간지원 프로그램 운영
냉장고 안 리모컨, 에필랩
③ 치매안심센터 인프라를 활용한 당사자 간 피어 서포트 체계 구축
일본 피어 서포트
④ 기업에서 경험전문가인 당사자를 제품·서비스 공동개발자로 참여하시키는 공동창조 프로그램 운영
후쿠오카 오렌지파트너스
⑤ 지역 필수 의료인프라 확충을 통한 경험전문가의 활동 조건 보장
제주 에필랩 사례
목차
요약
Ⅰ. 서론: 왜 지금 돌봄전환인가
Ⅱ. 한국 돌봄의 현황과 쟁점
Ⅲ. 돌봄체계의 한계
Ⅳ. 국제 동향: ‘For’에서 ‘With’로의 전환
Ⅴ. 당사자의 ‘경험전문가화’
Ⅵ. 돌봄 리빙랩의 실험
Ⅶ. 경험전문가 제도화를 위한 다섯 가지 과제
참고문헌

Ⅰ. 서론: 왜 지금 돌봄전환인가

이 리포트는 초고령사회 진입기 한국의 돌봄정책이 당사자를 ‘관리 대상’으로 보아온 한계를 짚고, 경험전문가(Lived Experience Expert)로 세우는 정책 전환을 제안한다. 경험전문가란 질병·돌봄을 직접 겪은 사람이 그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정책·연구·서비스 설계에 함께 참여하는 당사자를 말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치매·돌봄 수요와 재정 부담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당사자들은 이런 말을 반복한다. “서비스는 늘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없다”, “도움을 받는데도 외롭다.” 서비스 공급은 늘었지만, 당사자의 삶에 닿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의 돌봄체계는 전문가와 행정이 서비스를 설계·관리하고, 당사자는 그것을 받는 구조다. 당사자의 일상 경험과 지식은 정책 설계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 그 결과 집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 복합적인 필요, 1인 가구 증가와 같은 현실과 제도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해외에서는 당사자를 경험전문가로 인정하고, 정책 수립과 서비스 설계 과정에 직접 참여시키는 흐름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인도주의적 배려가 아니라, 정책의 효과와 정당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이 리포트는 세 가지 질문에 답한다. 첫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한국의 돌봄체계는 어떤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는가. 둘째, 주요 국가들은 당사자 참여와 경험전문가 전환을 어떻게 제도화하고 있는가. 셋째, 한국에서 이 전환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 과제는 무엇인가.

Ⅱ. 한국 돌봄의 현황과 쟁점

한국은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넘어가는 데 약 7년밖에 걸리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 중 하나다(국회도서관, 2024). 2024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는 약 1,000만 명으로 전체의 20%에 달하며,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치매는 이 변화의 중심에 있다. 65세 이상 치매 유병률은 9%대이고, 치매 환자 수는 2025년 약 97만 명에서 2050년 226만 명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보건복지부, 2025). 치매 전 단계인 경도인지장애 유병률도 높아, 향후 치매로 이어질 위험군이 상당히 존재한다. 국가 치매관리비용은 약 22조 원, GDP의 약 1% 수준이다.
비용 면에서도 시설·병원 입소 환자의 1인당 연간 관리비용은 지역사회 거주 치매환자보다 약 약 1.8배 높다(보건복지부, 2025). 재가 돌봄이 더 효율적임에도, 제도와 인프라는 여전히 시설·병원 중심에 가깝다.
노인들은 건강이 나빠진 이후에도 지금 사는 집에서 계속 살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국회도서관, 2024). 그러나 재가 장기요양 수급자 상당수는 방문요양 한 종목에만 의존하는 실정이다(공공데이터포털, 2025). 의료·돌봄·주거·일상생활 지원이 각각 다른 제도와 기관으로 나뉘어 있어, 필요한 서비스를 찾고 연결하는 부담이 고스란히 당사자와 가족에게 돌아간다.
출처: [국회도서관, 보건복지부, 공공데이터포털], 시각화: [Claude (Anthropic), 2026]
이 구조는 특히 혼자 사는 치매환자에게 취약하다. 지역사회 치매환자의 1인 가구 비율은 전체 노인보다 높은데(보건복지부, 2025), 현재 서비스 체계는 가족이 곁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가족이 없거나 돌봄 여력이 없는 경우 돌봄 공백은 쉽게 커진다. 치매환자 가족이 높은 부담과 삶의 질 저하를 호소하는 조사 결과는, 가족에게 돌봄을 떠넘기는 구조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2026년 3월 「의료·요양 등 지역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 이 시행되면서, 분절된 서비스를 지역사회 중심으로 묶으려는 시도가 시작됐다(보건복지부, 2026). 그러나 서비스의 양을 늘리고 연결성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Ⅲ. 돌봄체계의 한계

이 장에서는 한국 돌봄체계의 구조적 한계를 세 가지로 짚는다.
당사자를 수혜자로 보는 시선
파편화된 서비스와 보이지 않는 배제
여성에게 전가된 돌봄과 그 가치절하
1. 당사자를 수혜자로 파악하는 시선
지금은 돌봄체계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전문가와 행정이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서비스는 공급자가 설계하고, 당사자는 진단·연결·관리의 객체가 된다. 당사자의 일상 경험과 지식은 정책 설계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그 결과 당사자의 역할은 정해진 프로그램에 성실히 참여하는 ‘환자/이용자’로 축소된다.
치매안심센터 등 현장의 프로그램을 보면, 강의·인지훈련·검사 중심의 ‘전달’ 구조가 반복된다. 당사자들 사이의 대화와 경험 공유는 거의 없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를 모른 채 “서비스를 받으러 왔다가 돌아가는” 경험이 이어진다. 당사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자다움’을 수행하게 되고, 자신의 감정·불안·바람을 말로 꺼내거나 정책에 연결하는 출구를 찾기 어렵다.
반대로, 당사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장이 열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같은 진단을 받은 사람들끼리 일상과 감정을 나누는 순간, 당사자는 수혜자가 아니라 동료이자 지식의 생산자가 된다. 이 차이는 프로그램의 형식이 아니라, 정책이 당사자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다.
결국 문제는 “무엇을 얼마나 제공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중심에 서 있느냐”다. 당사자를 경험전문가로 보는 관점 전환 없이는, 서비스가 아무리 늘어도 외로움과 소외는 줄어들지 않는다.
2. 파편화된 서비스와 보이지 않는 배제
한국의 돌봄서비스는 제도·기관·사업별로 나뉘어 있다. 의료, 장기요양, 기초생활·주거, 장애·노인복지 등이 각각 다른 기준과 절차로 운영되어, 당사자와 가족은 필요한 지원을 찾으러 여러 창구를 돌아다녀야 한다.
재가 장기요양 수급자 다수가 방문요양 한 종목에만 의존하는 현실은, 복합적인 필요가 단편적인 서비스 하나로 축소되는 구조를 잘 보여준다. 통합돌봄이 도입됐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이런 경험이 반복된다. “서비스는 따로 신청해야 하고, 담당자는 자주 바뀌고, 상황 설명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제도는 있지만, 그 제도에 닿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격차는 오히려 커지고 있다.
이 구조는 특히 정보·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을 가장 먼저 밀어낸다. 치매 진단을 받았지만 어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서류 작성이나 온라인 신청이 어려운 사람, 곁에서 도와줄 가족이 없는 사람일수록 제도 안으로 들어오기 어렵다. 서비스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그 서비스에 닿을 수 있는 능력과 관계망이 실제 접근성을 좌우한다.
결국 지금 체계는 “알고, 찾아오고, 신청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다. 통합돌봄 정책이 분절된 서비스를 잇는 시도라면, 그 다음 과제는 “그 연결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끌어들이는 일이다.
3. 여성에게 전가된 돌봄과 구조적 가치절하
오랫동안 돌봄은 가족 안에서는 어머니·딸이, 제도 안에서는 여성 요양보호사·간병인이 맡아온 일이다. 이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돌봄을 여성의 당연한 역할로 여겨온 사회 구조의 결과다.
현 제도는 이 구조 위에 설계되어 있다. 재가서비스는 여성 가족 구성원이 기본 돌봄을 맡고, 제도는 이를 보조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치매 환자 가족의 높은 돌봄 부담과 삶의 질 저하는 호소하는 것은, 돌봄 책임이 가족, 특히 여성에게 집중된 결과다. 제도는 이를 문제로 보기보다 “가족이 있는 경우”를 기본값으로 삼아, 가족 돌봄을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발생한다. 가족이 없으면 제도 밖으로 밀려나고, 가족이 있어도 그 가족이 과부하를 버티는 방식으로 체계가 돌아간다. 어느 쪽도 지속가능하지 않다. 돌봄노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책임으로 어떻게 나눌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
젠더 관점에서 보면, 돌봄정책 논의는 서비스 개편을 넘어 돌봄노동의 가치와 책임 분담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다. 재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다. 경험전문가 패러다임도 마찬가지다. 돌봄을 여성과 가족에게 떠넘기는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일부 당사자만 정책 논의에 초대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 돌봄체계의 문제는 이 세 가지 ① 당사자를 수혜자로 보는 시선, ② 파편화와 서비스와 보이지 않는 배제, ③ 여성에게 전가된 돌봄과 구조적 가치절하가 서로 맞물려 있다는 데 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선 해외의 “With” 전략과 경험전문가 제도화 사례를 살펴본다.

Ⅳ. 국제 동향: ‘For’에서 ‘With’로의 전환

이 장에서는 치매·돌봄 정책에서 당사자를 경험전문가로 세우고 있는 일본, 미국, 영국의 사례를 살펴본다.
1. 일본 – 인지증기본법으로 전환을 법제화
일본은 2024년 「인지증기본법」을 시행하며 치매정책의 방향을 ‘환자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For)’에서 ‘당사자와 함께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With)’로 전환했다. 이 법과 이후 수립된 기본계획은 치매를 의료 문제가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가 함께 대응해야 할 사회적 과제로 규정하고, 당사자 참여를 원칙으로 명시했다.
법 제정 과정에서 인지증 본인 워킹그룹이 핵심 역할을 했다. 이들은 진단 이후의 삶, 필요한 지원, 편견 경험 등을 직접 언어화해 국회와 행정부에 제안했고, 그 내용이 기본법 조항과 지자체에 반영되었다. 이후 각 지자체는 당사자 의견을 담은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금융·유통·교통 등 민간 영역까지 포함하는 ‘인지증 친화 환경’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의 사례는 “당사자 워킹그룹 → 법·계획 → 지자체·민간 실행”이라는 흐름을 통해 경험전문가의 역할이 제도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미국 – 치료에서 ‘뇌 건강’·경험 중심 지원으로
미국은 국가 알츠하이머 프로젝트법(NAPA)을 통해 치매정책의 중장기 방향을 설정해 왔다. 최근 재승인 과정에서 정책 초점이 치료 중심에서 ‘위험요인 감소와 뇌 건강 증진’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당사자의 삶의 경험을 중심에 둔 돌봄 모델이 강조되고 있다.
GUIDE 프로그램 등에서는 사례관리자가 당사자와 가족을 중심에 두고 의료·돌봄·지역사회 자원을 통합적으로 조정한다. 당사자는 단순한 서비스 이용자가 아니라, 자신의 목표와 필요를 정의하고 계획 수립에 참여하는 주체로 다루어진다. 의료체계 안에서 경험전문가 관점을 접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3. 영국유럽 – 당사자 워킹그룹과 경험전문가 조직
영국과 유럽에서는 치매 당사자들이 직접 만든 워킹그룹과 국제 네트워크가 정책·연구·서비스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치매 워킹그룹(SDWG), 아일랜드 치매 워킹그룹(IDWG), 잉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 3개국 치매 워킹그룹 등은 국가 전략 수립, 법·제도 개선, 인식 개선 캠페인에 당사자의 목소리를 직접 반영하고 있다.
국제 조직인 디멘시아 얼라이언스 인터내셔널(DAI)은 치매 진단을 받은 당사자만 가입할 수 있다. 각국 정부·국제기구와의 협의에서 당사자 목소리를 대표하며, 서비스 기준·연구 과제·인권 개선사항을 제안하는 정책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4. 종합
나라마다 제도와 프로그램은 다르지만, 세 가지 흐름은 공통적이다. 첫째, 치매를 개별 환자의 의료 문제가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가 대응해야 할 사회·정책 과제로 본다. 둘째, 당사자를 서비스 수혜자가 아니라 정책·서비스 설계의 참여자이자 경험전문가로 세운다. 셋째, 당사자 조직·워킹그룹·피어 지원 등 당사자 기반 구조를 제도 안에 두고, 법·계획·프로그램 설계 단계에 참여시킨다.
이러한 흐름은 “Nothing About Us Without Us(우리 없이 우리에 관한 결정을 내리지 말라)”는 원칙이 치매·돌봄정책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Ⅴ. 당사자의 ‘경험전문가화’

1. 경험전문가란 누구인가
경험전문가는 질병·돌봄을 직접 겪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정책·연구·서비스 설계 과정에 전문적으로 참여하는 당사자다. 단순히 “대표로 참석하는 당사자”가 아니다. ① 진단 이후 실제로 도움이 됐던 것과 부족했던 것, ② 일상에서 불편과 불안을 줄여주는 환경과 동선, ③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드는 활동과 관계망. 이런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을 바탕으로 정책과 현장에 구체적인 제안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지식은 통계나 전문가 의견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렵다.
2. 왜 지금 ‘경험전문가’ 전환이 필요한가
첫째, 지속가능성의 문제다. 치매·돌봄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전문가와 제도만으로 모든 필요를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사자가 지식 생산자이자 상호 지원의 주체로 참여할 때, 시스템의 부담을 나누면서도 서비스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
둘째, 효과성의 문제다. 해외에서 당사자 워킹그룹, 피어 서포트, 공동창조(co-creation) 모델에 참여한 경험전문가들은 인지 기능 유지, 삶의 질 향상, 가족 부담 완화 등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당사자를 주체로 세우는 것은 인도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정책과 서비스의 효과를 높이는 전략이다.
셋째, 정당성의 문제다. 돌봄정책은 당사자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당사자가 설계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면, 정책은 현장과 어긋난 채 “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남기 쉽다. 경험전문가는 참여는 정책이 당사자의 현실과 언어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3. 전환의 출발점
경험전문가로의 전환은 거창한 제도 개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출발점은 비교적 단순하다.
정책 위원회와 자문기구에 당사자경험전문가 자리를 상시 마련하는 것,
서비스프로그램 개발 과정에서 당사자 검토를 의무화하는 것,
당사자가 자신의 경험을 말로 풀어낼 수 있도록 교육동료모임·리빙랩 등을 지원하는 것.
핵심은 “당사자의 경험을 먼저 듣고, 기록하고, 설계에 반영하는 과정”을 제도 안에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다.

Ⅵ. 돌봄 리빙랩의 실험

당사자의 경험전문가로 서는 과정이 한국 현장에서 어떻게 시도되고 있는지, 세 가지 돌봄 리빙랩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1. 서울 ‘냉장고 안 리모컨’ : 당사자와 창작자의 공동창조
서울 ‘냉장고 안 리모컨’은 초기 치매·경도인지장애 당사자와 창작자가 짝을 이뤄 5개월간 함께 작업하는 공동창조 프로젝트다. 이름에는 “냉장고에 리모컨을 넣어두는 행동을 단순한 증상이 아니라, 자신만의 삶의 방식으로 보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각 팀은 그림책, 기억 드로잉, 에세이 등 다양한 결과물을 함께 만들었다. 당사자는 자신의 기억·불안·일상을 언어와 이미지로 풀어내고, 창작자는 그 이야기가 형태를 갖추도록 돕는 동료가 됐다. 당사자는 프로그램 참가자가 아니라 공동창작자로, 창작자는 치료자가 아니라 협력자로 역할이 바뀐 셈이다.
이 프로젝트는 세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당사자의 경험이 창작과 만날 때 단순한 ‘사연’이 아니라 사회 인식을 바꾸는 서사가 될 수 있다. 둘째, 당사자의 감정·관계·시간감각처럼 수치로 측정하기 어려운 영역을 드러내어, 돌봄정책이 다뤄야 할 범위를 넓힌다. 셋째, 경험전문가가 되는 과정은 교육만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도 형성될 수 있다.
2. 칠곡 ‘냉장고 안 리모컨’ : 가족 돌봄 경험을 웹드라마로(경북)
경북 칠곡에서는 같은 이름의 프로젝트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중심은 치매 당사자가 아니라 그들을 돌보는 가족이다. 가족들의 실제 인터뷰와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만들고, 지역 팀과 함께 웹드라마를 제작했다.
웹드라마는 진단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족의 갈등, 오랜 돌봄 끝에 쌓이는 죄책감과 애착 등을 담아냈다. 참여자들은 인터뷰와 제작 과정을 통해 자신의 돌봄 경험을 다시 바라보고, “치매도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인식을 나눴다. 가족 돌봄자는 단순한 이야기 제공자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서사로 재구성하는 창작자이자 관객과 지역사회를 향한 경험전문가로 섰다.
3. 제주 에필랩 : 자조모임에서 정책 제안까지
제주 에필랩(뇌전증 생활실험실)과 자조모임 ‘한걸음더’는 당사자 가족이 경험전문가로 서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뇌전증과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공통된 문제를 확인했다. “제주에는 소아 뇌전증 전문 진료과가 거의 없다”, “응급 상황에서도 갈 곳이 없다”
이들은 하소연에 그치지 않았다. 현황 조사와 설문, 의료진 인터뷰, 정책자료 분석을 직접 수행했다. 그 결과를 보고서로 정리하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지역사회와 공유했으며, 도의회 토론회와 정책 제안으로 이어갔다. 당사자 가족은 자신의 경험을 데이터와 사례로 바꿔냈고, 행정과 정치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일부 제안은 실제로 교육·지원 제도에 반영됐다.
이 사례는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경험이 자조모임–리빙랩–정책 제안으로 이어질 때, 당사자는 단순한 요구자가 아니라 정책 공동설계자가 될 수 있다. 둘째, 지역 의료·돌봄 인프라의 격차가 크더라도, 당사자의 경험이 그 격차를 드러내고 제도 개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4. 종합
세 실험은 대상과 방식이 다르지만 공통된 흐름을 갖는다.
당사자가족의 경험이 ‘문제 사례’가 아니라지식으로 다뤄진다.
그 지식은 그림책웹드라마·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형태로 사회와 공유된다.
그 과정을 통해 당사자와 가족은 수혜자에서공동창작자정책 제안자, 즉 경험전문가로 서게 된다.
이는 경험전문가 제도화가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현장에서 진행 중인 실험을 인정하고 확장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Ⅶ. 경험전문가 제도화를 위한 다섯 가지 과제

1. 당사자 참여를 정책 설계의 원칙으로 명문화
치매·돌봄 관련 정책위원회에 당사자·경험전문가 참여를 의무화해야 한다. 의견 수렴 단계가 아니라, 정책 설계 초기 단계부터 경험전문가가 참여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일본 인지증기본법과 스코틀랜드 치매 워킹그룹 사례는 이러한 제도화를 이미 실현하고 있다.
2. 경험전문가 발굴, 중간지원 프로그램 운영
경험전문가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말로 풀어내고, 공적 자리에서 발언하며, 정책·연구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중간지원이 필요하다. 치매안심센터와 지역기관이 협력해 경험 언어화 프로그램, 교육, 정책·연구 참여 기회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냉장고 안 리모컨’과 ‘에필랩’ 사례는 이러한 지원이 당사자와 가족을 경험전문가로 성장시키는 경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피어 서포트 제도화
진단 직후는 정보와 정서적 지지가 동시에 필요한 시기이지만, 가장 고립되기 쉬운 시기이기도 하다. 이 공백을 채울 수 있는 피어 서포트 제도가 필요하다. 한국은 전국 256곳의 치매안심센터라는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이를 활용하면 교육받은 경험전문가가 새로 진단받은 당사자를 정기적으로 만나 경험을 나누는 피어 서포트 체계를 만들 수 있다.
Wenger(1998)의 실천공동체 개념에 따르면, 지식은 같은 실천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공동활동을 통해 만들어지며, 그 과정에서 공유된 이야기와 언어가 쌓인다. 피어 서포트는 이 원리를 돌봄 영역에 적용한 것이다. 치매·돌봄 당사자가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과정 자체가 지식 생산이며, 이는 다시 제도 개선의 자원이 될 수 있다.
4. 경험전문가와 기업의 공동창조 활동 지원
후쿠오카 ‘오렌지파트너스’ 모델은 기업이 당사자를 경험전문가로 제품·서비스 개발에 참여시킬 때 새로운 시장과 가치가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치매·돌봄 관련 제품·서비스 개발 시 당사자 참여를 설계 단계부터 포함하는 공동창조 모델을 확산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ESG, 사회적 가치 인증, 공공조달 가점 등과 연계해 이러한 시도를 하는 기업·기관에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
5. 의료 격차 해소
지역 간 의료 인프라 격차는 당사자가 경험전문가로 서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막는다. 제주 에필랩 사례에서 보듯, 전문 진료과 부재와 응급 대응의 어려움은 당사자와 가족의 선택지를 크게 좁힌다. 통합돌봄지원법이 의료·요양·돌봄의 통합을 지향하더라도, 필수 의료 인프라가 특정 지역에 쏠려 있으면 효과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돌봄전환 정책은 지역 간 필수 의료 인프라 균형 확보와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맺음말

경험전문가 패러다임은 단순한 용어 변경이 아니다. 지식과 의사결정의 중심에 당사자를 두는 방향으로 돌봄체계 전체를 다시 짜는 일이다. 당사자의 경험을 정책 설계의 자원으로 인정하고, 제도 안에 참여 경로를 만드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일부 지역과 현장에서 시작된 변화가 국가·지자체 돌봄정책 전반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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