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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컬럼 13호] 단계배 당구대회

단계배 당구대회
시아버님이 얼마 전 돌아가셨다. 폐암 4기 진단을 받고 두 달 만의 일이었다. 진단 직전까지도 바둑을 두고 당구를 치고, 작년까지 골프를 치셨다. 여든 중반의 나이였다.
장례식에서 조의금 봉투를 정리하다 한 봉투에 시선이 멈췄다. '단계당구클럽.' 시아버님의 호가 단계였다. 동네 당구장에서 만나 어울리던 친구분들이 클럽 이름에 그분의 호를 붙여놓은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단계배 당구대회'라는 이름의 대회도 있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이름이 모임의 이름이 되고, 대회의 이름이 되어 동네 안에 살아있었다.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발인에 장지까지 따라온 분들이 많았다.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슬퍼하는 얼굴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계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 시아버님은 참 잘 살다 가셨구나. 그리고 그 '잘'은 통장의 잔고나 직함의 무게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하버드대학교는 1938년부터 85년 넘게 한 가지 질문을 추적해왔다. "사람을 진짜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700명이 넘는 참가자의 삶을 평생 따라간 이 연구가 도달한 결론은 한 줄이다. 좋은 관계. 부도, 명성도, 직업적 성취도 아닌 따뜻한 관계의 질이 노년의 행복과 건강을 가장 강하게 예측했다. 연구 책임자 로버트 월딩어는 말한다. 외로움은 그 자체로 강력한 건강 위험 요인이라고. 반대로 따뜻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은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았다.
비슷한 통찰이 지구 반대편에서도 발견된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 안데스 원주민의 오랜 철학에 '부엔 비비르(Buen Vivir)'라는 개념이 있다. '잘 사는 것', 더 정확하게는 '충만한 삶'이라는 뜻이다. 핵심은 단순하다. 개인의 축적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조화로운 삶,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호혜와 균형이 진짜 '잘 사는 것'이라는 사상이다. 2008년 에콰도르는 이 개념을 헌법 전문에 새겼다. 발전의 목표를 GDP가 아니라 부엔 비비르로 다시 정의한 것이다.
한쪽은 미국 동부의 정량 연구이고 한쪽은 안데스의 토착 철학인데, 결론은 신기하게도 한 곳에서 만난다. 잘 사는 것의 핵심은 관계라고. 혼자 축적한 자산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짜낸 삶의 질감이라고.
시아버님은 어쩌면 우리 시대가 잃어가고 있는 그 감각을 끝까지 지킨 분이었다. 일도 열심히 하셨지만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래서 폐암 4기라는 가혹한 진단 앞에서도 마지막까지 외롭지 않으셨다. 같이 당구 치던 친구가 있었고, 골프장에서 만나던 동료가 있었고, 호를 따 클럽 이름을 지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잘 사는 것의 조건을 자꾸 돈으로만 환산하는 시대에, 시아버님의 부고는 다른 회계 방식을 가르쳐주고 갔다. 단계배 당구대회. 그 한 줄에 그분의 삶이 다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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