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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컬럼 19호] 시계 바늘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계 바늘이 움직이고 있었다
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 목욕 봉사를 했던 적이 있다. 움직일 수 없는 몸,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 그 병실 안에는 시간이 멈춰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양보호사가 다가서면 눈빛이 달라지는 어르신이 있었다. 숨의 리듬이 바뀌는 분이 있었다. 말이 없어도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공간 안에서도 관계가 흐르고 있었고, 돌봄이 일어나고 있었다. 병실 벽에 걸린 시계 바늘은 움직이고 있었다.
사회학자 조안 트론토는 돌봄을 다섯 단계로 설명한다. 필요를 알아채는 것,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 실제로 돌보는 행위, 돌봄을 받는 사람의 반응, 그리고 마지막으로 '함께 돌봄(caring with)'. 돌봄이 특정 누군가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짊어지는 민주주의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날 병실에서 내가 본 것은 그 첫 번째 단계였다. 눈빛, 숨결, 몸의 미세한 움직임을 알아채는 것 — 그것이 돌봄의 시작이었다.
연세대 이지은 교수의 연구는 이 장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네덜란드의 한 요양시설에서 말을 거의 하지 못하는 어르신에게 요양보호사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줬다. 그랬더니 그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말을 하지 않는 분인데, 동시에 음악을 듣고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분"이라고 요양보호사는 말했다. 잠재되어 있던 역량이 관계적 실천을 통해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지은은 이것을 '관계적 역량'이라고 부른다. 돌봄은 돌봄을 받는 사람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확장하는 실천이라는 것이다.
그날 병실에서 나는 또 하나의 감각을 얻었다. 저 어르신의 삶과 내 삶이 어딘가에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불교 사상가 틱낫한은 이것을 '인터빙(interbeing)'이라고 불렀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서로 안에 있다. 저 분의 존엄이 무너지는 사회는 나의 존엄도 안전하지 않은 사회다. 돌봄은 연민이 아니라 연결이다.
좋은 돌봄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여는 일은 돌봄을 받는 사람만이 아니라 돌보는 사람의 삶도 함께 확장한다. 콧노래를 이끌어낸 요양보호사는 그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새롭게 발견했을 것이다. 트론토가 말한 '함께 돌봄'은 그렇게 시작된다. 시계 바늘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아채는 것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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