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생겼다, 그 다음은
"저는 가족돌봄청년 아니에요. 신청 안 할래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오랫동안 알코올 의존이 심한 삼촌을 돌봐온 청년이 지원사업 안내를 받고 한 말이다. 또 다른 청년은 "저는 그렇게 책임감이 없어요"라며 자신이 대상자가 아니라고 했다. 둘 다 명백히 가족돌봄청년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오히려 그들을 밀어냈다.
이 청년들은 어제오늘 생겨난 존재가 아니다. 아픈 부모 곁에서 학교를 다닌 아이, 장애 형제를 돌보며 취업을 미룬 청년, 치매 조부모를 돌보며 자신의 삶을 뒤로 미룬 청년. 오랫동안 거기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보이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언어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철학자 미란다 프리커는 이것을 '인식론적 불의'라고 불렀다.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말해도 신뢰받지 못하는 것 — "청년이 뭘 알겠어", "그건 개인 사정이잖아요." 다른 하나는 경험을 설명할 언어 자체가 없는 것. 이름이 없으면 그 경험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 지원을 요청할 수도, 연대할 수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도 없다. '가족돌봄청년'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 이 청년들이 놓여 있던 자리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 의미에서 이름이 생긴 것은 분명한 진전이다. 올해 관련 법률도 통과됐다. 그러나 이름이 생긴 것이 끝이 아니다. 작가 조기현은 이 역설을 정확히 짚는다. "'가족돌봄청년'은 돌봄을 덜 하게 하려고 만든 말인데 실제로는 의무를 강조하는 뉘앙스를 준다. 원어 영케어러에 없는 '가족'이 붙으면서 당사자도, 복지 실무자도 이 이름을 쓰기 꺼린다." 2022년 보건복지부 영케어러 실태조사에 따르면 가족 범위를 넘어 돌봄을 하는 청년이 19~34세 기준 22.93%에 달한다. '가족'이라는 말이 이미 현실을 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제안한다. '가족돌봄청년'에서 가족을 떼어내고 '돌봄청년'으로 부르자고.
이름을 다듬는 것과 함께, 사회적 기반도 만들어져야 한다. 이 청년들의 목소리가 제도 설계에 직접 반영되는 구조, 그들의 경험이 취약성이 아니라 역량으로 인정받는 문화. 담당 종사자들이 이 청년들을 지원 대상이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주체로 바라볼 때, 불의는 비로소 실질적으로 극복되기 시작한다.
이름이 생겼다. 그 이름을 계속 다듬어가는 일, 그리고 그 이름 뒤에 사회가 실질적으로 응답하는 일, 이제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