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 기노시타 토루는 한때 자신이 잘하는 일이 있다고 자부했다. 정확한 용량의 약으로 치매 환자의 '문제 행동'을 가라앉히는 일이었다. 어느 날 그는 대규모 공영 주택단지를 방문했다. 딱딱한 바닥에, 옷도 걸치지 않은 채 누워 있는 한 노인을 봤다. 곁에는 물병과 소변통뿐이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일은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지친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그는 이후 약으로 증상을 잠재우는 대신, 그 행동에 담긴 이유를 당사자에게 직접 묻기 시작했다.
일본의 인류학자 기타나카 준코가 2021년에 쓴 논문 「공감의 한계: 일본의 치매 당사자 운동」을 읽으며 마주한 장면이다. 이 논문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일본이 치매를 이해해온 방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한다. 처음엔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1980년대까지도 상황은 참혹했다. 배회를 막는다며 구속복을 입히고 침대에 묶어두는 병원이 있었다. 돌봄과 관리의 대상을 거쳐, 지금은 당사자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당사자 운동'의 시대에 이르렀다. 전환점은 2004년 교토에서 열린 국제알츠하이머협회 총회였다. 호주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당사자 활동가들의 발언을 들은 일본의 치매인들이,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의 핵심 주장이 인상 깊었다. 당사자들은 이제 '공감'이 아니라 '권리'를 요구한다. 이 요구는 새롭지 않다. 1970년대 뇌성마비 당사자들의 '푸른잔디회' 운동도 이미 같은 권리를 요구했다. 정신과 의사 도이 다케오가 짚은 '아마에(甘え)' -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서 마음을 헤아려주길 바라는 심리 - 처럼, 일본 사회는 상대에게 직접 묻기보다 그 마음을 짐작해서 돌보는 문화를 미덕으로 여겨왔다. 그런데 그 짐작이 당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돌보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 되기 쉽다는 게 문제다. 좋아하지 않는 채소를 몸에 좋다는 이유로 먹이고, 하고 싶지 않은 운동을 시키고, 걱정된다는 이유로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것조차 막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존재는 서서히 질식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과 다시 마주했다. 경험전문가화 연구를 하며 늘 물어온 것이다. 우리가 당사자를 위해 무엇을 느끼는가가 아니라, 당사자가 스스로 무엇을 알고 말할 수 있는가. 참여가 아니라 발언권, 자문이 아니라 저작권. 당사자는 돌봄의 대상에서 지식의 생산자로 옮겨가야 한다.
한국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지난 4월 제10회 치매생태계세미나에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세진 연구위원은 정책의 방향이 '안심'에서 '돌봄권'으로, 'Person-centered'에서 관계·지역사회를 포함한 'People-centered'로 확장되고 있다고 짚었다. 같은 자리에서 임덕영 연구위원은 일본이 2023년 제정한 「공생사회 실현을 위한 치매기본법」을 소개했다. 이 법은 치매 당사자를 보호 대상이 아니라 '시민'으로 규정하고, '경험 전문가'로 인정해 정책과 서비스 설계에 직접 참여시킨다. 내가 붙들고 있던 그 단어는, 이미 일본의 법 조문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한국은 아직 그 법을 참고하며 방향을 가늠하는 단계다.
나는 돌봄리빙랩을 통해 이 격차를 조금씩 좁히고 싶다. 당사자를 초대해 의견을 듣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당사자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의하고, 그 지식이 정책과 서비스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드는 것 - 그것이 다음 단계다. 시민이 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이야기의 저자가 된다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