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베레스포드는 1977년부터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자이자 연구자, 활동가로 살아온 사람이다. 2020년에 쓴 논문에서 그는 지난 40여 년간 '공공·환자 참여(PPI)'라 불려온 것들을 되짚는다. 그가 발견한 건, 같은 이름이지만 사실 전혀 다른 두 가지가 뒤섞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1980년대 시장주의 개혁과 함께 들어온 소비자 모델 - 의견을 듣긴 하되 결정권은 주지 않는 방식이다. 말할 기회는 주지만 의사결정의 주체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장애인·정신질환 생존자 운동에서 나온, 더 평등한 삶을 위한 참여다. 전자는 정보를 얻으려 하고, 후자는 권력을 나누려 한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참여가 형식적이 되는 문제가 시작된다고 그는 말한다.
전통적인 연구는 중립성과 객관적 거리를 미덕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 기준으로 보면, 문제에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편향된' 목소리로 취급된다. 가난을 겪은 사람, 차별을 겪은 사람의 말은 '가까이 있어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베레스포드는 이걸 뒤집는다. 경험에서 나온 지식이야말로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이라고. 이 배제를 프리커는 '인식론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라 불렀다.
베레스포드는 참여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을 다섯 갈래로 짚었다. 성별·인종·계급 같은 형평성 문제, 거주 형태, 소통 방식의 차이, 손상의 정도, 그리고 '원치 않는 목소리'로 취급되는 경우다. 마지막 갈래의 예시에 치매 당사자가 들어 있었다. 권위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장 절실한 당사자가 가장 먼저 배제되는 역설이다.
많은 기업이 사회공헌 활동을 한다. 대상자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일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고, 의사결정 구조 안에 실제로 들어오게 하고, 그 과정에서 정체성과 역량이 함께 자라는 것까지 진정성 있게 추구하는 사회공헌은 많지 않다. 대개는 대상자의 이야기를 자원으로 가져다 쓰고, 만족도로 성과를 보고하는 데서 멈춘다.
이 논문을 읽으며 에자이의 미션 문장이 떠올랐다."생활자가 가장 충만한 삶을 실현하도록 역량강화한다."는 문장이 정관에 새겨진 기업 이념이다. 대상도 '환자와 가족'에서 '환자와 생활자 전체'로 넓어졌고, 그 과정을 통해 "건강에 대한 불안을 완화하고(relieving anxiety over health) 건강 격차를 줄이는 것(reducing health disparities)"을 '사회적 선(social good)'이라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베레스포드의 질문을 그대로 가져오면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여기서 '역량강화한다'는 건 어느 쪽일까. 생활자의 만족도를 측정하고 서비스를 개선하는 소비자 모델일까, 아니면 생활자의 경험을 지식의 원천으로 인정하고 함께 설계하는 모델일까.
나는 에자이가 선언한 역량강화(empowerment)가 여기서 멈추지 않길 바란다. 당사자의 암묵지를 꺼내어 신약 개발이나 서비스 설계에 쓰는 것은, 방식이 정교해졌을 뿐 여전히 지식을 가져다 쓰는 일이다. 진짜 힘을 싣는다는 건, 그 과정을 통해 당사자 스스로가 경험전문가로 자라나는 것이다. 참여의 결과물이 회사의 지식창고에만 쌓이는 게 아니라, 참여한 사람의 정체성과 발언권으로도 함께 쌓여야 한다. 의견을 듣는 것과 지식을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참여자를 소비하고, 후자는 참여자와 함께 만든다. 생활자가 정말 충만한 삶에 가까워지려면, 그의 만족을 재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의 앎과 자람을 인정하는 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