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보건복지돌봄 공공기관은 늘 바쁘다. 실무자들은 모니터 뒤에서 복잡한 성과지표(KPI)와 씨름하고, 지자체는 ‘돌봄 혁신’을 선언하며 새로운 센터와 바우처 사업을 쏟아낸다. 그러나 정작 돌봄 현장은 고단하며, 당사자들의 고립은 깊어만 간다. 수천억 예산이 낭비되는 이 개혁의 무대 뒤에서 당사자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들은 주체성을 거세당한 채, 공공기관의 KPI 달성을 위한 ‘실적용 대상자’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러한 모순을 파헤치기 위해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공공행정을 지배해 온 ‘신공공관리(NPM)’의 병폐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영국의 정책 연구자 데이비드 보일과 마이클 해리스(Boyle & Harris, 2009)는 현대 복지 제도가 단기 성과에 매몰되어 ‘통제의 종교’에 빠졌다고 고발한다. 그들이 소개한 한 실무자의 사연은 남의 일이 아니다. 그는 44개의 자금 줄, 9개의 복잡한 표, 82개의 행정 목표를 관리하느라 정작 근무 시간의 겨우 40% 미만을 본업에 썼다. 그는 이 통제 시스템을 향해 “즉각적인 성과에만 집착하는 관리 방식은 중독과 다르지 않다”며 절규했다. 숫자와 서류에 에너지를 빼앗긴 현장에서 관계 맺기라는 돌봄의 본질은 설 자리를 잃는다.
예방과 역량 강화가 실종된 이유는 명확하다. 당사자의 자립을 돕고 관계망을 구축하는 활동은 단기 예산안에서 쉽게 수치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행정은 비용 산출이 쉬운 단기 처방과 시설 건립 같은 ‘미봉책(Patching)’에만 골몰한다. 그 대가는 참혹하다. 당사자를 역량이 거세된 ‘결핍의 묶음’으로 취급하는 서비스 전달 방식은 당사자의 자생력을 도태시킨다. 더 큰 비극은 당사자가 지속적으로 도움을 받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회복은 미뤄지며, 국가가 돌봄 수요를 인위적으로 계속 만들어내는 ‘수요의 제조(Manufactured Demand)’라는 악순환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학자 피터 베레스포드(Peter Beresford, 2020)는 공공기관이 당사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 역시 기만적인 지식의 ‘추출(Extraction)’에 가깝다고 꼬집는다. 행정은 “치매 친화”, “기후정의”라는 타이틀을 걸고 당사자를 회의장에 앉혀 의견을 묻는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목소리를 행정 실적용 서류로 쏙 빼가는 과정일 뿐, 정책의 판을 짤 수 있는 진짜 권한(Empowerment)은 내어주지 않는다. 당사자가 몸으로 겪어낸 ‘경험 지식(Experiential Knowledge)’은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높은 장벽 앞에서 늘 ‘사소하고 편향된 의견’으로 깎아내려 진다. 이는 사회적 불평등을 넘어선 지독한 ‘인식론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이다.
이제 임시방편의 덧대기식 복지는 수명을 다했다. 60년 전 영국의 복지국가 기틀을 다진 윌리엄 베버리지가 말했듯, 지금은 “미봉책이 아니라 혁명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는 당사자를 수동적 수혜자에서 자기 삶을 직접 설계하고 전달하는 ‘경험전문가’로 재정의해야 한다. 가족과 이웃, 지역사회의 신뢰라는 고유한 돌봄의 기본 운영체제(OS), 즉 ‘핵심 경제(Core Economy)’를 복원하지 않는 그 어떤 복지 기술도 무용지물이다. 공공기관의 KPI 숫자를 지우고, 고개를 돌려 당사자들의 생생한 눈빛과 관계의 힘을 마주해야 한다. 진짜 복지는 행정의 실적 칸이 아니라, 그들의 삶터에서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