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생산의 도전(The Challenge of Co-production): 이론적 토대와 돌봄리빙랩을 위한 실천적 함의
1. 서론: 공공서비스 개혁의 위기와 공동생산의 전략적 등장
영국의 공공서비스는 지난 수십 년간 막대한 자산 투입에도 불구하고 소득 및 건강 불평등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왔습니다. Boyle & Harris(2009)는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공동생산(Co-production)'이라는 급진적 대안을 제시합니다. 이는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Beveridge Report)가 복지 국가의 초석을 다졌던 것과 비견될 만한 현대 공공서비스의 가장 중요한 혁명적 전환점입니다.
기존의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 모델은 중앙집권적 목표 설정, 기계적인 성과 지표, 그리고 전문가 중심의 서비스 전달에 매몰되었습니다. 이러한 '효율성 중심'의 개혁은 전문가와 사용자를 공급자와 소비자라는 인위적 관계로 분리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서비스 시스템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보다는 발생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 급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공공서비스는 단순한 '패치(Patching)' 수준의 개정을 넘어, 사용자를 서비스의 기획과 전달의 평등한 파트너로 세우는 구조적 변혁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2. 공동생산의 본질적 정의와 핵심 원칙: '업무 전가'를 넘어서
공동생산의 성공적 안착을 위해서는 개념적 엄밀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공동생산은 전문가와 서비스 사용자, 가족, 이웃이 평등하고 호혜적인 관계를 구축하여 서비스를 실현하는 프로세스입니다.
'우편번호 오류(Postcode Error)'와 권력의 문제
호주 우체국이 우편번호 기입을 사용자의 '공동생산'으로 칭한 사례는 공동생산의 가장 흔한 오해를 보여줍니다. 이는 전문가의 업무를 사용자에게 떠넘기는 '업무 전가(Work-shifting)'일 뿐입니다. 진정한 공동생산은 단순한 협조가 아니라, 의사결정 권한과 실행의 책임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사용자가 힘(Power)을 갖지 못한 채 노동력만 제공하는 행위는 공동생산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핵심 원칙: 자산과 핵심 경제
1.
자산으로서의 사람(People as Assets): 사용자를 수동적인 '수혜자'나 '결핍된 존재'로 보지 않고, 시스템을 재구축할 수 있는 풍요로운 '숨겨진 자원'으로 정의합니다. 사용자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그 자산은 '위축(Atrophy)'됩니다.
2.
핵심 경제(Core Economy)의 재건: 가족, 공동체, 이웃으로 구성된 '핵심 경제'는 공공서비스라는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필수적인 '사회적 운영 체제'입니다. 공동생산은 무너진 핵심 경제를 복원하여 공공서비스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합니다.
3. 토니 보베어드(Tony Bovaird)의 기획-전달 매트릭스 분석
공동생산은 서비스의 기획(Design)과 전달(Delivery) 주체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
서비스 전달 \ 기획 주체 | 전문가 중심 기획 | 공동 기획 (전문가+사용자) | 사용자 중심 기획 |
전문가 중심 전달 | 전통적 공공서비스 | 사용자 참여형 기획 | 전문가 투입 없는 기획 |
공동 전달 | 전문가 주도 하의 사용자 공동 전달 | 완전한 공동생산 (Full Co-production) | 사용자 중심 전달 (전문가 보조) |
사용자 중심 전달 | 전문가 기획의 사용자 전달 | 사용자와 공동 기획 후 사용자 전달 | 자발적 지역사회 활동 (Self-organized) |
완전한 공동생산(Full Co-production) 영역은 단순히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꾀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이는 공공기관이 독점해온 통제권을 사용자 공동체에 넘겨주는 '제도적 통제권의 포기(Institutional surrender of control)'이자 진정한 권력의 이동을 의미합니다.
4. 공동생산의 경계 획정: '인식론적 불정의'와 토크니즘 방지
Beresford(2020)는 기존의 환자·공공 참여(PPI) 방식이 흔히 빠지는 함정을 지적합니다. 이를 통해 공동생산의 경계를 더욱 명확히 할 수 있습니다.
1.
의견수렴(Consultation)의 한계: 이는 전문가가 필요한 정보만 뽑아내는 '정보 추출(Extraction)'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Beresford는 이를 '인식론적 불정의(Epistemic Injustice)'라고 비판하며, 당사자의 생생한 삶의 경험(Experiential Knowledge)이 전문가의 지식보다 낮게 평가되는 권력 구조를 지적합니다.
2.
자원봉사(Volunteering)의 한계: 전통적인 시혜적 봉사는 시혜자와 수혜자의 위계적 이분법을 강화합니다. 공동생산은 누구나 기여하고 보상받는 호혜성(Reciprocity)을 필수 전제로 합니다.
3.
개인예산제/바우처(Personal Budgets)의 한계: 이는 사용자에게 선택권을 주지만, 강력한 사회적 네트워크(지원 체계)가 결여될 경우 단순한 시장 거래(Consumer model)로 전락하여 사용자의 고립을 심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실무적 시사점: 이러한 구분이 모호해질 때 공동생산은 '토크니즘(Tokenism, 명목상의 참여)'이나 무의미한 좀비 정책으로 전락합니다. 부천 리빙랩은 당사자가 '정보의 원천'을 넘어 '변화의 주체'가 되는 권한 부여에 집중해야 합니다.
5. 공동생산의 4대 혁신 기제: 변화를 이끄는 동력
1.
변혁적 역량(Transformative Power): 전문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에서 시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조력자(Facilitator)'로 전환됩니다.
2.
평등한 참여(Equal Participation): 전문가의 학술적 지식과 사용자의 삶의 경험을 대등한 가치로 인정하며, 지식의 위계를 해체합니다.
3.
인간 자산의 풍요(Human Assets): 시스템이 보지 못했던 사용자의 숨겨진 재능을 발굴하고, 이를 발휘하게 함으로써 인간 자산의 위축을 막습니다.
4.
위탁조달 개혁(Commissioning Reform): 계약의 초점을 단순 '산출량'에서 '사회적 성과(Outcomes)'로 전환합니다. 특히, 시스템의 불통으로 인해 발생하는 '실패 수요(Failure Demand)'(관계 무시로 인한 오류 처리 등 전체 수요의 40~80% 차지)를 근본적으로 줄이는 데 집중합니다.
6. 비용 효율성 및 성과 실증: 데이터에 기반한 가치 입증
공동생산은 경제적으로도 우월한 전략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사례 프로그램 | 주요 성과 및 경제적 효과 | 데이터 포인트 |
미국 NFP (간호사-가족 파트너십) | 아동 학대 및 방치 48% 감소, 아동당 편익 발생 | 투자 대비 5배 편익 (아동당 $41,000 절감) |
청소년 법원 (Teen Court) | 또래 배심원을 통한 재범률 감소 및 예산 절감 | 재범률 17%(기존 30% 대비), 사법 비용 아동당 $11,510 절감 |
영국 Shared Lives | 시설 거주 대신 지역사회 공동 생활 모델 | 기존 시설 지원 대비 주당 약 £995 비용 절감 |
숙련 환자(Expert Patient) 프로그램 | 만성질환자의 자가 관리 능력 향상 및 의료 수요 감소 | GP(일반의) 방문 7% 감소, 응급실 방문 16% 감소 |
이러한 데이터는 공공 예산 지출을 사후 치료에서 사전 예방적 투자로 전환해야 할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7. 공동생산의 장벽과 새로운 비전: '사회를 통한 국가의 재구축'
공동생산을 가로막는 3대 장벽은 단기 성과 중심의 계량 지표(Metrics), 부서 간 성과 공유를 저해하는 칸막이 회계(Silo Accounting), 그리고 시민 참여를 불안 요소로 보는 위험 기피(Risk Aversion) 문화입니다. 특히 영국의 VBS(신원 확인 및 차단 시스템) 사례에서 보듯, 위험 기피 문화는 전과나 중독을 극복한 '경험 전문가'들의 참여를 원천 차단하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합니다.
로빈 머레이(Robin Murray)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적 경제'**를 제안합니다. 이는 국가가 서비스를 직접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분산된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를 통한 국가의 재구축'**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국가는 모든 것을 생산하는 주체가 아니라, 시민들의 관계망이 활성화되도록 돕는 플랫폼이자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8. 실천적 인사이트: 돌봄리빙랩 적용 전략
1) 당사자 자산화 및 피어 서포트 전략
경도인지장애 노인을 단순한 '돌봄 대상'으로 두면 그들의 역량은 위축(Atrophy)됩니다. 영국의 '숙련 환자 프로그램' 데이터(GP 방문 7% 감소)를 돌봄리빙랩에 대입하면, 당사자를 '치매 예방 피어서포터'로 전환할 때 지역 보건소와 클리닉의 과부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당사자의 경험은 전문가가 제공할 수 없는 '인식론적 정의'를 실현하는 강력한 치유 자원입니다.
2) 호혜적 메커니즘: 시간은행(Time Bank) 연계
공동생산의 핵심인 '호혜성'을 구현하기 위해 지역 내 '시간은행' 모델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노인들의 비시장 노동(돌봄, 교육 등)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상하는 기제입니다. 당사자가 이웃을 돕고 얻은 '시간 크레딧'은 향후 자신의 돌봄 서비스로 교환됩니다. 이는 단순한 자원봉사를 넘어 지역의 '핵심 경제'를 활성화하는 전략적 도구입니다.
3) 리빙랩 성공을 위한 3가지 핵심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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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이동과 제도적 포기: 리빙랩 운영 위원회에서 시민과 당사자가 전문가와 동등한 의결권을 갖는 구조를 명문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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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수요 측정을 통한 성과 관리: 기술 테스트 결과만이 아니라, 공동생산을 통해 불필요한 행정적·의료적 '실패 수요'가 얼마나 감소했는지를 KPI로 설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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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중심 인프라 구축: 리빙랩이 단순한 기술 테스트베드를 넘어, 시민 간의 '관계 밀도'를 높이고 상호 신뢰를 쌓는 '사회적 네트워크 형성'의 장이 되게 합니다.
9. 결론: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
공동생산은 고갈되어가는 공공 예산과 파편화된 현대 사회를 위한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생존 전략'입니다. 전문가가 권한을 공유하고 사용자의 지식을 존중할 때, 공공서비스는 비로소 더 효율적이고(Effective), 인간적이며(Humane), 변혁적인(Transformative) 힘을 갖게 됩니다. 돌봄리빙랩은 당사자의 자산을 발굴하고 호혜적 관계망을 재건함으로써, 한국 공공서비스 혁신의 선도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