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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컬럼 30호] 기부는 시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투자다

오늘 한 장애인권단체의 후원조직위원회 회의에 다녀왔다. 오래 활동해온 단체인데도 정기후원회원 수는 몇 년째 제자리라고 했다. 회의 내내 반복된 말은 "후원받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단체가 하는 일은 자선이 아니다.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을 상담하고 소송하고, 그렇게 판례를 남기고 제도를 조금씩 밀어내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에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다. 휠체어를 전달하거나 캠페인을 벌이는 활동은 사진이 남고 기업 홍보가 되지만, 상담하고 소송해서 제도를 바꾸는 일은 몇 년이 걸려도 변변한 사진 한 장 남기기 어렵다.
한국의 기부 문화도 이 어려움과 무관하지 않다. 2024년 국내 기부금 총액은 16.8조 원으로 늘었지만, 통계청 사회조사 기준 기부 참여율은 2011년 36.4%에서 2021년 21.6%까지 떨어졌다가 2023년에야 23.7%로 겨우 반등했다. 세계기부지수 조사에서 한국은 146개국 중 60위, GDP 대비 기부금 비중은 0.77%에 그친다. 그리고 그 기부금 대부분은 동정하기 쉬운 대상, 눈에 보이는 결핍을 가진 이들에게 향한다. 시스템을 바꾸는 일에는 좀처럼 향하지 않는다.
기업의 사회공헌도 같은 갈림길 위에 있다. 한동안 CSR을 넘어 CSV로 가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마이클 포터는 웃돈을 얹어주는 CSR과, 네슬레가 코트디부아르 코코아 농가와 새 품종·재배 기술·협력 체계를 함께 만든 CSV를 구분했다. 그런데 CSV도 결국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잣대 위에 있다. 사회적 가치도 사업 이익으로 환산될 때만 투자할 가치를 얻는다.
지금 논의되는 ESG는 그 잣대 자체를 바꾸자는 쪽에 가깝다.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가 제시한 도넛경제학이 이 흐름의 이론적 배경 중 하나다. 도넛의 안쪽 고리는 누구나 누려야 할 사회적 기초 - 보건, 교육, 소득, 정치적 발언권, 사회적 공평함 같은 것들이다. 바깥 고리는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손실 같은 생태적 한계다. 이 두 고리 사이, 도넛 모양의 좁은 공간이 인류가 머물러야 할 안전하고 정의로운 자리다. 기업의 투자 기준이 "이게 우리 사업에 도움이 되는가"에서 "이게 사회적 기초를 지키고 생태적 한계를 넘지 않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나는 이런 활동에의 후원이 시민 모두의 책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책임을 CSR·ESG라 부른다면, 시민 개개인에게도 그에 대응하는 책임이 있다. 사회구조를 바꾸는 단체를 적어도 하나쯤 후원하는 것, 그것을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 SR)이라 부르고 싶다. 장애, 질병, 노화, 차별. 이 중 어느 것도 남의 일로만 남지 않는다. 누구나 언젠가 당사자가 된다. 그러니 이런 단체의 활동을 후원하는 일은 시혜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 사회의 미래에 넣는 보험이자 투자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일회성 기부나 사진 찍기 좋은 봉사활동을 넘어, 당사자의 역량을 키우고 차별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활동에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그것이 사업에 당장 도움이 되는지를 넘어, 사회의 기초와 지구의 한계 안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미래사회로의 전환을 만드는 것은 한 번의 선의가 아니라, 계속되는 관계이다. 나의 관심과 지지가 모두의 미래를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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