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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컬럼 32호] 경도인지장애, 진단 다음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은 분들이, 그 다음엔 어디로 가시나요?"
지난 9월 18일, 은평구청에서 열린 건강이웃 사업 성과공유회에서 이 사업을 함께 설계한 한국에자이 안우석 부장이 질문을 던졌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서울광역치매센터, 은평구치매안심센터가 처음 이 사업을 논의할 때 가장 많이 나왔던 질문이다. 우리는 치매를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치매 '직전' 단계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자리도 마련해두지 않았다.
보건복지부의 2023년 치매역학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9.25%다. 여기에 더해 여러 조사에서는 국내 경도인지장애(MCI) 추정 환자가 이미 300만 명에 육박한다고 본다. 은평구치매안심센터 유미숙 부센터장의 말처럼 "정상에서 곧바로 치매로 넘어가는 것보다, 경도인지장애를 거쳐 치매로 넘어가는 속도가 4~5배 빠르다." 치매는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이 '직전 단계'에서 사회가 하는 일은 진단명 하나를 붙여주는 것뿐이다.
이번 성과공유회에서 만난 한 MCI 당사자는 "약속을 잘 잊어버려서 검사를 받아보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자존심에 검사를 미루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며 집에서만 지내다 보니 발음도 어눌해지고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렇게 고립되어 가던 그가 만난 것이, 한국에자이와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지원으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은평구에서 5개월간 시범 운영한 'MCI 노인일자리' 사업이었다. MCI 진단을 받은 어르신 10명과 기존 노인일자리 참여자('건강이웃') 10명을 짝지어 매주 가정을 방문하게 한 이 사업에서, 그는 "사람과 환경이 이렇게도 사람을 달라지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돌아봤다.
결과는 수치로도 드러났다. 5개월간 인지기능 검사(MoCA) 점수는 평균 1.6점 상승했고, 우울감은 줄고 자아존중감은 올라갔다. 짝을 이룬 건강이웃 선생님에게 처음엔 "왜 자꾸 이것저것 가르쳐주려 하느냐"는 서운함마저 느꼈다던 이 어르신은, 이내 스스로 이렇게 정리했다. "이유는 제 학생이 아니라, 함께하는 동료잖아요." 진단 이후 처음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건 우연한 성공담이 아니다. WHO도 2026년 가이드라인에서 신체·인지·사회활동을 함께 제공하는 다영역 복합중재로 치매 위험을 최대 45%까지 예방·지연할 수 있다고 밝혔다. 도쿄도 건강장수의료센터연구소의 추적연구에서도 사회활동에 참여한 고령자의 뇌 위축 속도가 유의미하게 느려진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은평구의 이 작은 시범사업은 그 국제적 근거를 한국의 골목 안에서 그대로 재현해 보인 것뿐이다.
문제는 이 성과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질 위기에 있다는 것이다. 민간 기업의 지원만으로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예산이 끊기면 오늘 동료를 만난 열 분의 어르신은 내일 다시 혼자가 된다. 전국 노인일자리 가능자 115만 명 중 20만 명이 순서를 기다리는 지금, 은평구에 등록된 MCI 당사자는 2,800명이지만 실제 추정 규모는 3만 7천 명에 이른다. 유미숙 부센터장의 말대로 "이번에 선정되어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열 분 외에도 훨씬 많은 분들이" 아무 자리 없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일본은 이미 2024년 인지증기본법에서 '환자를 위해'라는 말을 '당사자와 함께'로 바꿨다. 장애계에서 오래 외쳐온 "우리 없이 우리에 관한 결정을 내리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는 원칙이, 이제 치매·인지저하 정책에도 국제적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제도를 발명하는 일이 아니다. 이미 검증된 이 작은 모델을 보건복지부 노인일자리 사업의 정식 유형으로 편입시키는 결단이면 충분하다.
성과공유회에서 만난 그 어르신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MCI라고 해서 일을 못하는 게 아니다.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어야 하고,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이 사업을 처음부터 함께 설계해온 사람으로서, 나는 그날 참았던 말을 여기서는 아껴두지 않으려 한다. 빨리 내년부터라도 법제화가 되어서, MCI가 있어도 당당하게 공적 시스템 안에서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생길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노력해봤으면 좋겠다. 경도인지장애가 있어도 일할 수 있고, 일할 자리가 있고, 함께 일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갖춰질 때, MCI는 더 이상 사회에서 밀려나는 진단명이 아니라 다시 이웃으로 돌아오는 문턱이 될 수 있다. 그 문턱을 낮추는 일을, 더는 민간의 선의와 한시적 예산에만 맡겨둘 수 없다. 제도화는 선택이 아니라, 이미 늦은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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